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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57. <부정공>성재공휘병익유사(醒齋公諱秉翼遺事)
1. 문헌 목록 〉21. 21世 〉59. <부정공>창규(彰奎)配 유인이천서씨묘표(孺人利川徐氏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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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부정공>난파휘병규유사(欄坡諱炳奎遺事)
欄坡諱炳奎遺事 公諱炳奎字元瑞玉川府院君諱元吉后觀水亭諱時聖八世孫公賦性正直孝友兼備學識高明讀書看史至忠臣義士立節處末嘗不擊節三復而欷欽也 哲廟己未以三學士躋享大報壇事與各道儒生有封章叫閽之意聯名伏閤遂因當路諸臣之所沮未蒙允因貶于鍾城在匪所日誦經傳縣之來學者甚衆居四年聞仙馭賓天南望痛哭如喪考妣後三年丙寅洋亂聞魚將軍在淵之殉節稱歎不己曰忠哉魚公恨不使吾同死於敵以扶尊攘之義也其後蒙宥將還鍾之民士莫不含涙而餞于長亭至京卿士大夫迎門笑語如鬼關人生來而慰以酒饌贈以詩文未及家十里聞親喪在殯擗踊哭泣如不欲生被髮徒跣至殯悲號如袒括時親戚隣里爲之感泣而居廬三年非展墓不出中門外守喪如儀焉嗚呼以公之志節文學爲命數所畸有志未就歸作白鹿居士而歿惜哉公於學洙之王父碁隱公爲再總服弟故學洙竊恐事行之泯湮忘僭略草焉 난파휘병규유사(欄坡諱炳奎遺事) 공의 휘는 병규(炳奎)요, 자는 원서(元瑞)로 옥천부원군 원길(元吉) 후 관수정공(觀水亭公) 시성(時聖)의 八세손이시다.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효우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식이 고명하여 글을 읽거나 「사기」를 볼 때에 충신 의사가 절의 세운 대목에 이르러서는 장책을 치며 세 번 반복해 읽고는 탄식하고 흠모하였다. 철종(哲宗) 기미년(一八五九)에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척화신(斥和臣)인 三학사 홍익한(洪翼漢)·오달제(呉達濟)·윤집(尹集)을 대보단(大報壇)에 제행하기 위하여 각 도의 유생과 더불어 소장을 주상하고 궐문에 엎드려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부르짖었으나 요로(要路)에 있는 신하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윤허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었다. 적소에 있을 때 날로 경전을 외니 고을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곳에 있은 지 四년 만에 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쪽을 향해 통곡하기를 부모를 잃은 것 같이 하였다. 三년 뒤인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는 감탄하여 가로되 「충성스럽다. 어공이여, 나로 하여금 함께 적에게 죽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를 붙잡지 못하게 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사면되자 종성의 백성과 선비가 눈물을 머금고 장정(長亭)에까지 전송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으며, 서울에 당도하니 경사대부(卿士大夫)가 문에까지 마중 나와 웃으며 「귀관인(鬼關人)이 살아온 것 같다.」고 말하며 주찬으로써 위로하고 시문(詩文)을 써 주었다. 집에서 채 十리도 못 미쳐 이르렀을 때 친상이 빈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땅을 치고 뛰며 곡읍하기를 살고자 아니할 것같이 하였으며, 또한 머리를 풀고 발을 벗고 빈소에 이르러 슬피 부르짖기를 초상 때 같이 하니 이웃 고을의 친척들이 모두 이에 감읍하였다. 三년 동안 시묘하며 성묘 때가 아니면 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아, 공의 지절과 문학이 명수 소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백록거사(白鹿居士)로 별세하니 아깝도다. 공이 학수(學洙)의 왕부 기은공(碁隱公)의 재시복제(再緦服弟)가 되므로 학수가 사행의 민몰을 두려워하여 외람되이 대략 기초한다. 族孫 學洙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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